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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y 말랭이힐라 2025. 1. 19.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長)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갖추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強)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문명과 나를 내세우지 않고 뭇 세상과 조화롭게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의 방식을 권한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道는 노자, 장자 등 이른바 道家의 전유물이 아니고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들 사이에서 상용되던 단어이다. 道의 개념 내지 의미는 학파와 사상가에 따라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나지만 대체로 정치, 윤리, 전쟁, 인생, 우주 등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도는 有의 사건으로부터 추상되는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의 道는 無이다. 無를 단순히 有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有이므로 無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無를 알았을까? 도덕경은 聖人이 無를 알아가는 旅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때 聖人은 단순히 無를 알아가는 여정에 오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독자를 聖人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도덕경의 목표이다.

無는 有가 아니므로 聖人에게 무엇인가 ‘어두운 존재’로 다가온다. 이에 聖人은 무에 투신(投身)함으로써 ‘無의 운동’을 일으키고, 이를 통하여 無에 동화되고 無를 닮고 無를 안다. 따라서 無를 아는 것은 無의 운동의 결과이다.(1장 玄之又玄) 無의 운동은 無知無欲과 無爲로 이루어진다. 無知는 無를 지향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無로부터 끊임없이 玄의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며, 無爲는 그 깨달음이 성인의 일상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玄은 無에서 비롯하는 새로운 자아로서 굳이 정의하자면 ‘無에서 나온 無’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과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有를 하는데, 이때 의지는 경험과 이성을 이끄는 주체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경험과 이성으로는 無를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無를 알기 위해 오히려 경험과 이성을 부정(否定)하고 그 결과 의지까지도 부정한다. 이때 聖人은 단순한 ‘나’로 머물면서 無 안에 잠기게 된다. 聖人은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얻고 이로써 無를 안다. 이런 이유로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無知라고 한다. 이때 성인은 욕구(欲)로부터 초연한 새로운 자아(玄)의 깨달음을 얻는데(1장 常無欲以觀其妙) 그 無欲의 깨달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노자는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道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노자의 道는 확실히 사람과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누는 ‘神的인’ 존재이다,

無知는 聖人이 道를 사랑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道가 聖人을 사랑하는 활동이다. 이 두 활동은 동시적인 사건으로서 하나의 짝을 이루기 때문에 둘을 함께 묶어서 無知無欲(2장)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道를 사랑하면 道는 반드시 그를 사랑한다.

無知無欲의 활동이 聖人의 삶으로 드러난 것을 無爲라고 한다. 聖人은 無知無欲에 근거하여 無爲를 실천하는데 이것은 그가 얻고 있는 신적인 자아(玄)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無爲自然의 自然은 바로 이 신적인 본성을 가리킨다. 聖人은 욕구에 일방적으로 복종하거나 규범으로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욕구를 다스린다.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천하와 만물을 완전하게 다스리는 결과를 낳는다. (10장 愛民治國)

道德經의 德은 無知無欲과 無爲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다. 德은 또한 ‘道를 실천하는 일(行)’이다. 無知無欲이 道의 뿌리라면 無爲는 道의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69장 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無知無欲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無爲를 실천할 수 없다. 聖人은 無知無欲의 內的 운동을 우선한다. 無爲自然의 外的 활동은 내적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無知無欲을 거들떠보지 않고 無爲自然을 찬미하지만 물론 모두 공염불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경험과 이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無의 운동은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므로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노자는 부득이하게 比喩(parable)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대부분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도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無의 운동은 매우 쉽고 단순하며(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無의 운동을 통하여 모든 비유의 의미가 저절로 밝혀진다.

지금 말하는 비유는 직유(simile), 은유(metaphore), 상징(symbolism), 類推(analogy), 寓話(allegory) 등 우회적 표현법을 모두 포함한다. 비유를 풀어내려면 반드시 道를 실천해야만 한다. 따라서 道를 실천하지 않고 도덕경을 해석하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道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道의 실천을 도외시하고 무모하게도 道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이 내놓은 도덕경 해설서들 중 그 어떤 것도 도덕경 전체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며 그나마 내용의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 도덕경의 비유는 그 자체로 독자들이 道를 실천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